18. 행운의 인형은 어디에
로스콘과 마드리드
3월은 좀 기묘한 달이다. 시기적으로나 기후적으로나. 해가 바뀌고 두 달이 지난 시점. 새해에 시작한 다짐과 시작 특유의 들뜸이 어느 정도 일상에 희석되고 어색했던 년도 수와 더해진 나이가 손과 입에 익었을 무렵. 두 달의 유예가 끝났음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 공휴일로 달을 시작하고 나면 비로소 오롯이 새해를 맞이한 기분이 든다. 학생시절 3월은 새 학기가 시작하는 때이기도 해서 시작의 인상이 더욱 강렬했는데 학교를 졸업한 지 제법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3월이 되면 1월과는 다른 방식으로 설레곤 한다. 연차가 새롭게 생기는 시점이 3월이라 더욱 그런 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쌀쌀한 아침, 대문을 나서자 바람에서 매화 향이 은은히 실려오면 아, 봄이구나, 싶은 마음이 드는 때도 3월이다. 매화와 산수유가 피고 벚꽃은 아직인 때. 겨우 내 입었던 패딩 점퍼를 제쳐 두고 옷차림을 가볍게 하는데, 꼭 그렇게 겨울 옷을 다 정리하고 나면 비웃기라도 하는 듯 기온이 뚝 떨어져서 세탁소에 맡기려 모아둔 옷더미에서 스웨터를 주섬주섬 찾아 입게 만드는 달도 3월이다.
기묘한 시작의 달인 3월의 한가운데. 아스라이 보이는 봄을 기다리며 떠오른 빵은 스페인에서 일 년에 한 번, 새해가 시작될 때 먹는다는 빵 “로스꼰 데 레예스(Roscón de Reyes)”다. 정확히는 동방박사가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를 찾아온 날을 기념하는 1월 6일, 동방박사의 날에 먹는 전통 빵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동방박사의 날로 번역하지만 스페인어로는 “Días del los Reyes Magos”로 동방박사를 왕으로 지칭하기 때문에 빵 이름에도 왕(Reyes)이 들어간다. 이름에 걸맞게 모양도 왕관과 비슷하다. 도넛 모양으로 가운데가 빈 원형 빵에 각종 과일이나 젤리, 견과류를 보석처럼 장식한다.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바르는 것처럼 빵을 반으로 가른 뒤 생크림을 채워 내기도 한다. 크기는 도넛이나 베이글보다 훨씬 커서 머리에 쓸 수 있을 정도다.
몇 년 전 스페인을 여행했을 때, 동방박사의 날을 마드리드에서 맞았다. 덕분에 그 시기에만 판매한다는 로스꼰 데 레예스를 접할 수 있었다. 1894년에 문을 열었다는 마드리드 중심가의 오래된 빵집에서는 화려하게 장식한 로스꼰 데 레예스를 매대 가득 선보였다. 생각보다 더 거대한 크기에 살짝 놀랐다. 하나를 통으로 살 수도 있고 조각으로 살 수도 있었다. 보통은 하나를 통째로 사서 선물하기도 하고 가족들이 모여 나누어 먹는다고 한다. 제대로 경험하려면 온전히 하나를 사야겠지만 도저히 둘이서 먹을 양으로 보이지 않아 맛만 볼 요량으로 엄마와 나는 한 조각만 구매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로스꼰 데 레예스 속에는 작은 인형이 들어 있다는 점이다. 인형이 들어있는 조각을 받는 사람, 그러니까 로스꼰 데 레예스를 먹다가 인형을 발견하는 사람에게는 행운이 찾아온다는 속설이 전해 내려온다. 원래는 마른 콩이 들어있었지만 언제부턴가 인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가게 바 테이블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서서 점원이 로스꼰 데 레예스를 썰어내는 걸 테이블 너머로 바라보며 엄마와 나는 우리가 사는 조각에 인형이 들어 있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인형을 발견하는 행운으로 다시 한번 마드리드에, 스페인에 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가게 안은 명절을 맞아 로스꼰 데 레예스를 사러 온 사람으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고 저마다 상자에 포장한 로스꼰 데 레예스를 한 손에 들고 가게 문을 나섰다. 우리처럼 바 테이블에서 빵을 맛보길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다.
드디어 두툼하게 썰린 빵 조각이 테이블이 놓였다. 과연 어떤 모양의 인형을 만날까, 행여나 빵을 씹다 인형까지 씹어버리는 건 아닐까, 조심스레 로스꼰 데 레예스를 잘라먹기 시작했다. 오렌지 향이 났고 달달했다. 딱 보이는 그대로의 맛. 세련된 베이커리나 브랜드 체인점 말고 동네에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은 작지만 오래된 빵집에서 파는 그런 빵과 닮은 맛이 났는데 투박한 생김새도 동네 빵집 쪽이 더 어울려 보였다. 비단 로스꼰 데 레예스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음식 이 대체로 섬세하기보다는 투박하고 담대한 매력이 있는 것 같다.
행운의 여신은 아무래도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접시가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우리 앞에는 그저 깨끗이 비워진 접시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로스꼰 데 레예스의 행운은 다른 이에게 갔던 걸까. 어쩌면 조각으로 판매하는 로스꼰 데 레예스는 애초에 인형을 넣지 않고 만드는 걸지도 모르겠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동방박사의 날 즈음에 다시 한번 스페인에 가야겠다. 이번에는 작은 사이즈라도 하나를 통으로 사 먹어야지. 그렇게 오롯이 동방박사의 행운을 가져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