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구독자 님께, 안녕하세요. 금요예찬으로는 처음 뵙는 큐레이터Q입니다. 주말 평안히 보내셨나요? 지난 편지를 쓸 때는 여름 끝자락이었는데 벌써 바람에 가을 향기가 짙습니다. 그 향기에 어쭙잖은 제 글이 어여삐 묻어 가면 좋겠네요. 🧐 지난 금요알람 보기 산에 오르면 김종관 감독의 영화 "최악의 하루(2016)"에서 은희(한예리 분)는 족히 7cm는 되어 보이는 구두를 신고 남산을 오르내린다. 아스팔트 도로가 깔려 있긴 하지만 그래도 산이라 경사가 제법 있을 텐데 구두를 신고 산을 오르내리느라 배우가
고생을 좀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내 인생 가장 힘들었던 등산이 떠올랐다. 대학생이 되어 두 번째로 맞는 가을이었다. 과방은 묘하게 들떠 있었는데
곧 있을 산행 겸 야유회 준비 때문이었다. 평소 운동을 극도로 싫어하는 데다 등산은 중학교 삼 년 동안
한 걸로 충분했던지라 산행에 따라갈 생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우리 학번은 유난히 유대관계가 돈독했고
동기들 대부분이 참가 의사를 밝혔으며 “계룡산은 험준한 산이 아니며 줄을 잡고 올라가는 힘든 코스도
없다. 등산은 잠깐 하고 동학사 밑에서 막걸리 마시고 노는 게 야유회다.”라는 선배들의 꾐에 빠져 “그럼 저도 갈래요.”라고 한 것이 화근이었다. "등산은 잠깐하고 동학사 밑에서 막걸리 마시고 노는 게 야유회다.”라는 선배들의 꾐에 빠져 “그럼 저도 갈래요.”라고 한 것이 화근이었다. 산에 오르는 길에 줄은 없었지만 철로 된 봉이 암반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계단이 엄청나게 많았다. 재잘거리던 동기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말이 없어졌다. 도저히 등산 속도를 따라가질 못하는 나를 보다 못한 동기 하나가 내 가방을 대신 메었다. 참 민폐였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어도 도로 내려올 엄두가 나지 않아서
거의 울면서 산을 올랐다. 네 시간에 걸친 등산 끝에 계룡산 정상에 도착했다. 난 충격에 휩싸였다. 끝없이 이어진 산맥의 반복. “산 너머 산”이라는 속담이 문자 그대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산 정상인데 왜 바다가 안 보여?”
산에 오르면 바다가 보인다. 이는 내게 매우 단순하고 무결하며 당연한
명제였다. 스무 살 가을, 계룡산 정상에 오르기 전까지는. “무슨 소리야. 산에 와서
왜 바다를 찾아?” 동기는 처음에는 내 질문을 농담으로 받았다가 사뭇 진지한 내 표정을 보고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섞어 되물었다. 그제야 나는 “산에 오르면 바다가 보인다”는 명제가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계룡산은 내륙에 있는
산이라 이곳 정상에서 바다가 보일 리 없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 누군가에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일 수도 있다는 걸 나는 네 시간에 걸친 등산 후 계룡산 정상에 올라서야 알게 되었다. 산에 오르면 바다가 보인다. 이는 내게 매우 단순하고 무결하며 당연한 명제였다. 스무 살 가을, 계룡산 정상에 오르기 전까지는. 정기를 받을 산 하나쯤은 다들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여느 초, 중, 고등학교가 으레 그렇듯 봄, 가을마다 있는 소풍의 목적지는 대부분
산이었다. 반 친구들의 손을 잡고 선생님과 오른 산에서는 작게 든 크게 든 바다가 보였다. 나는 왜구가 쳐들어오면 봉화를 올려 침입을 알렸다는 역사적 설명을 황령산 봉화대 옆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듣고
자랐다. 연초 해맞이를 하러 가까운 뒷산에 올랐을 때도 해가 뜨는 곳은 항상 수평선 너머였다. 광안대교에서 열린 불꽃 축제가 학교 옥상에서 보였다. 그렇게 열아홉
해를 살다가 내 인생 최고로 힘든 등산을 했는데 정상에서 기껏 보이는 것이 산 너머 산이라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거칠어졌던 호흡도 마음도 가라앉을 때쯤 다시 풍광이 눈에 들어왔다. 굽이굽이
이어진 산 능선이 파도와 비슷해 보였다. 산에 와서 바다를 찾다니, 나도
어쩔 수 없는 바닷사람인가. 이렇게 평생 바다를 그리워하며 살게 될까.
그렇게 될까.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남산에 오르기를 늘 미뤘다. 남산 타워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모습이 궁금하다. 바다는 보이지 않겠지. 대신
한강이 보이려나. 거미줄처럼 펼쳐진 복잡한 서울의 도로를 바삐 움직이는 자동차와 빼곡히 숲을 이룬 빌딩과
아파트가 만들어낸 기묘한 스카이라인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또 어떤 깨달음이 머리를 후려칠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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