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구독자 님께, 안녕하세요. 금요예찬 쓰는 큐레이터Q입니다. 어렸을 때 주판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던 기억, 혹시 있으신가요? 영화 『히든 피겨스』를 보다 문득 그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오늘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산기 너머 화장대 아래에는 항상 주판이 있었다. 엄마는 가계부 사이에 주판을 끼워 화장대
밑에 보관하곤 하셨는데 나는 손을 뻗어 넣어 가계부 사이에 끼어 있는 주판을 끄집어 내서는 장난감 마냥 가지고 놀기를 좋아했다. 주판을 기차놀이하듯 굴리거나 주판알을 튕기며 가계부를 쓰는 엄마 흉내를 냈는데 정작 그것이 계산을 할 때 쓰는
도구인지는 몰랐다. 장난감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장난감도 아닌 물건을 가지고 놀았던 건 그저 엄마를
따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땐 어른들이 쓰는 물건은 모두 신기해 보이고 써보고 싶으니까
말이다. 반들반들한 나무와 주판알을 한꺼번에 튕길 때 나는 차르륵하는 소리도 좋았다. 주판은 엄마의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했다. 엄마가 옥수수처럼 가지런히 매달린 주판알을
움직여 숫자를 셈하는 모습은 흡사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보아도 그저 나무 조각일 뿐인데
그걸 손가락으로 퉁기는 것만으로 어떻게 가계부 속 복잡한 숫자를 모두 정리할 수 있는 건지 볼수록 놀라웠다. 엄마는
암산도 무척 빨랐는데 머리 속으로 주판알이 움직이는 형상을 떠올린다고 했다. 내가 하도 신기하게 여기니까
엄마가 주판으로 사칙연산을 계산하는 법을 알려주셨는데 나는 전자계산기에 이미 익숙했던 지라 주판 사용법을 익히는 일이 더 어려웠다. “나야 이게 익숙하니까 쓰는 거지, 누가 요즘 주판을 쓰나. 필요 없다. 전자계산기 써라.” 주판은 엄마의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했다. 엄마가 옥수수처럼 가지런히 매달린 주판알을 움직여 숫자를 셈하는 모습은 흡사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는 온고지신의 마음으로 정성을 다한 딸의 마음을 대번에 쿨하게 받아치고는 신문물인 전자계산기를 하사했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진기한 암산 능력을 계승하지 못했고 주판의 마법은 수십 년째 고이 봉인되어 안방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영화 『히든 피겨스』에서 캐서린 존슨은 뛰어난 계산 능력으로 컴퓨터보다 정확하게 우주선의 궤도를 계산해 낸다. 그 모습을 보고 어렸을 적 주판을 튕기며 가계부를 쓰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심각한 표정으로 검지와 새끼손가락에 연필을 걸고 존슨은 소형 계산기와 종이를 오가며 우주선의 착륙 궤도를 계산했고, 엄마는 주판과 가계부를 오가며 우리 집 살림을 가늠했다. 둘 모두 엄숙하고 정교했다. 존슨은 소형 계산기와 종이를 오가며 우주선의 착륙 궤도를 계산했고 엄마는 주판과 가계부를 오가며 우리 집 살림을 가늠했다. 둘 모두 엄숙하고 정교했다. 존슨은 이후 아폴로 11호 발사 프로젝트에도 참여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 컴퓨터가 발전하면서 계산원이 사라져 갈 때도 그녀는 나사에 남아 핵심 인재로 활약했다. 아마도 그녀는 계산기 너머 숫자가 가진 진짜 의미를 볼 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내게 굳이 주판 사용법을 알려주지 않은 이유도 그 어드매에 닿아 있을 테다. 주판을 가지고 놀기만 했기 때문인지 나는 어렸을 때도, 지금도 계산을 참 못한다. 학교 다니는 내내 단순한 사칙연산에서 실수가 잦아 기껏 식을 제대로 세워놓고도 틀린 답을 내는 일이 빈번했다. 암산은 말할 것도 없다. 현금으로 계산할 때면 매번 거스름돈을 생각하느라 진땀을 뺐다. 요즘은 웬만한 일에는 카드를 써서 돈 계산을 직접 할 필요가 거의 없고 가끔 그런 일이 생길 때에도 스마트폰을 쓸 수 있다. 일을 할 때도 복잡한 계산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모두 대신해 준다. 컴퓨터에서 계산 오류가 발생해 존슨이 수기로 우주선 궤도를 검증해야 했던 때가 불과 60년 전인데 말이다. 대신 나는 계산기 너머 숫자를 읽는 법을 배웠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금요알람은 언제나 당신의 이야기를 환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