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구독자 님께, 안녕하세요. 금요예찬 쓰는 큐레이터Q입니다. 매번 인사말을 쓰는 일이 참 어렵습니다. 본문을 쓰고 나면 에너지가 다 소진되어서 반쯤 넋이 나가있기 때문이지요. 변변찮은 저의 글을 기꺼이 읽어주는 님의 상냥함에 늘상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 빚에 보답하도록 열심히 쓰겠습니다. 오늘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삶은 감자를 먹는 일 *영화 『토리노의 말 (2011)』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토리노의 말』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속수무책으로 혼란했다. 꽤 오래전 일인데도 그때 들었던 감정이 글을 쓰는 지금도 생생하다. 영화가
시작하면 늙은 남자가 거센 바람을 맞으며 마차를 몰고 가는 장면이 오랫동안 나온다 (이때 이 영화의
심상치 않음을 알아챘어야 했다). 남자가 집에 도착하고 그의 아내인지 딸일지 모를 여자가 그를 맞아
함께 말을 마구간에 두고 집으로 들어간다. 여자는 남자가 외출복을 벗는 걸 돕는다. 남자의 몸이 성치 않아 거동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대사 하나
없이 그 장면이 길게 이어졌다. 별달리 사건이라고 할 것 없는 옷 갈아입는 장면을 그리도 집요하고 세세하게
묘사하다니. 이건 심상치 않은 영화다. 내가 보았던 그 어떤
영화와도 다르다. 심상치 않은 기운은 남자가 감자를 먹는 장면에서 극에 달했다. 영화는 남자가
뜨거운 삶은 감자를 입으로 후후 불어가며 먹는 장면을 어떤 카메라 워크도 배경 음악도 없이 오분 가까이 담아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어쩌다 나는 이름도 모르는 남자가 감자를 까먹는
장면을 이렇게나 오래 보고 있는가. 이건 도저히 못할 짓이다 싶어 영화를 꺼버렸다. “영화적 한계를 뛰어넘는 압도적 걸작”이란 영화 포스터 속 수식어가
공허하게 울렸다. 겁도 없이 “이 시대 유일한 시네 아티스트”로 불리는 감독의 영화에 달려든 뭣도 모르는 애송이는 영화가 이십여 분만에 KO패하고
말았다. 내가 기겁하며 영화를 꺼버리게 만들었던 감자 먹는 장면은 영화에서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 그때마다 감자는 삶은 감자에서 구운 감자로, 마지막에는 생감자로 바뀌었다. 코로나19로 누군가와 만나는 일을 끝없이 유예하던 어느 날 불현듯 이 영화를
다시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기필코 엔딩을 보고 말리라.
미루어 둔 방학 숙제를 해치우듯 결연한 자세로 영화를 재생했다. 영화는 아주 느리게 세상의
종말을 그리고 있었다. 예전에는 전혀 몰랐다. 이 영화가
종말을 향해 속절없이 나아가고 있는 줄. 영화 속에서 하루가 지날 때마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것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우물이 마르고 불씨가 꺼졌다. 내가
기겁하며 영화를 꺼버리게 만들었던 감자 먹는 장면은 영화에서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 그때마다 감자는 삶은 감자에서 구운 감자로, 마지막에는 생감자로 바뀌었다. 영화는 생감자를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을 응시하다 페이드아웃하며 끝났다. 영화가 끝나고 한참 동안 멍했다. 영화 속 이미지가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속으로 영상을 떠올리다 다시 영화 보기를 반복했다. 주파수가
맞아 공진하는 소리굽쇠처럼 곱씹을수록 흑백 영상이 증폭되었다. 끝없이 불어대는 황량하고 메마른 바람과
별다른 소품도 없이 소박한 시골집 부엌, 오래된 램프에서 흔들리는 불빛, 말없이 감자를 먹는 두 사람. 그 장면 하나하나를 사진으로 박제해
벽에 걸어 두고 싶었다. 포스터 속에 있었던 “압도적”이라는 표현은 이런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었을 거라고 조심스레 짐작했다.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조용히 묵혀두었다가 언젠가 이 영화를 꺼내 보고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식탁에 삶은 감자를 두고 말이다. 처음에는 영화를 꺼버리게 만들었던 감자 먹는 장면이 어째서 이번에는 이렇게 다르게 보였을까? 그때는 잘 몰랐던 니체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에 대해 겉핥기 식으로나마 알게 되어서 일까, 아니면 학교를 졸업하고 밥벌이를 하고 나이를 먹는 일이 영화를 이해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 걸까, 그것도 아니면 그저 영화 보기에 적절한 때를 만난 걸까. 참으로
미스터리다. 이유가 무엇이든 『토리노의 말』을 보며 언어로 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분명 있다고, 그걸 위해 사람들은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고 때로는 그 모든 걸 담아 영화를 만든다는 생각을
오랜만에 했다. 그간 멀찌감치 미루어 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1968)』이나 『베를린 천사의 시 (1987)』를
이제는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묘한 용기도 얻었다. 여전히 『토리노의 말』은 남에게 쉬이 보라고 권할 만한 영화는 아니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이 영화를 권하는 일 자체가 터무니없이 느껴졌다면 지금은 그래도 한 번은 이 영화를 보면 좋겠다고, 그래서
내가 느낀 이 감정을 당신도 느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다.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조용히 묵혀두었다가 언젠가 이 영화를 꺼내 보고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식탁에 삶은 감자를 두고 말이다. 토리노의 말 (벨라 타르, 2011) 중에서 금요알람은 언제나 당신의 이야기를 환영합니다. |